서천(西天) 역경(譯經)삼장 조산대부(朝散大夫) 시광록경(試光祿卿) 전범(傳梵)대사 사자(賜紫)사문 신 법호(法護) 등 한역
대승입제불경계지광명장엄경 제3권
“다시 묘길상이여, 중생의 얼굴에 상ㆍ중ㆍ하가 있기 때문에 허공에 상ㆍ중ㆍ하가 있다고 한다. 여래ㆍ응공ㆍ정등정각도 이와 같아서 모든 곳에 평등하여 차별과 분별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이 없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으며, 색상(色相)이 없고 희론이 없으며, 표시가 없고 시설이 없으며, 각촉(覺觸)이 없고 집착이 없으며, 헤아림[稱量]이 없고 헤아림을 초월하며, 비유가 없고 비유를 초월하며, 머무름이 없고 취함이 없으며, 눈의 경계를 초월하고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를 떠났으며, 상모(狀貌)가 없고 문자가 없으며, 음성이 없고 작의(作意)가 없으며, 나감이 없고 들어옴이 없으며, 높음이 없고 낮음이 없으며, 말의 경계를 초월하고 일체의 곳에 앎을 따르고 들어감을 따르나니, 다만 중생들이 상ㆍ중ㆍ하의 성품을 위하기 때문에 여래에게 상중하가 있음을 보느니라.
묘길상이여, 그러나 여래께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 않으신다.
‘지금 이 1류(類)는 하품(下品) 신해의 중생이니, 나는 마땅히 이들을 위해 하품의 신상을 나타내리라. 이 1류는 중품 신해의 중생이니, 나는 마땅히 이들을 위해 중품의 신상을 나타내리라. 이 1류는 상품 신해의 중생이니, 나는 마땅히 이들을 위해 상품의 신상을 나타내리라.’
여래의 설법도 이와 같아서 다만 한 음성으로 중생을 위해 설법하면 그 중생의 무리에 따라 각각 깨닫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 않으신다.
‘이 무리 중생은 하품의 신해이니, 나는 마땅히 이들에게 성문승의 법을 설하리라. 이 무리 중생은 중품의 신해이니, 나는 마땅히 이들에게 연각승의 법을 설하리라. 이 무리 중생은 상품의 신해이니, 나는 마땅히 이들에게 보살승의 법을 설하리라.’
여래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 않으신다.
‘이 무리 중생의 신해는 보시이니, 나는 마땅히 이들에게 보시바라밀다의 법을 설하리라. 이 무리 중생의 신해는 지계(持戒)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이니, 나는 마땅히 이들에게 모든 바라밀다의 법을 연설하리라.’
그리하여 여래께서는 모든 법에 대해 분별을 내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여래의 법신은 필경 무생(無生)이니 여래는 무생이기 때문이요, 무생이기 때문에 명색으로 연설하거나 알음알이를 따라 변하지 않는다. 여래께서는 찰나의 잠깐 사이에도 분별이 없으시다. 여래께서는 다함없는 상을 갖추셨으니, 진제(盡際)와 실제(實際)가 다 결정되었기 때문이니, 이것이 일체 법의 평등한 실제이다. 여래ㆍ응공ㆍ정등정각께서는 모든 곳에 평등하시어 상ㆍ중ㆍ하의 차별의 분별이 없으시며, 모든 법이 평등하여 상ㆍ중ㆍ하의 차별의 분별이 없는 것도 이와 같으시다. 왜냐하면 일체의 법은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묘길상이여, 만일 모든 법이 얻을 바가 없으면 곧 모든 법은 평등한 것이요, 만일 법이 평등하면 법은 항상 머무는 것이며, 법이 항상 머물면 움직임이 없고, 움직임이 없으면 의지함이 없으며, 만일 모든 법이 의지함이 없으면 마음이 머무는 바가 없고, 마음이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곧 생함[生]이 없으면서도 생하느니라.
만일 이렇게 관찰하면 곧 마음이 마음에 굴려도 전도되지 않고, 그 전도되지 않는 마음은 곧 말대로 얻을 것이며, 만일 말대로 얻으면 곧 희론이 없고, 만일 희론이 없으면 곧 소행이 없으며, 만일 소행이 없으면 곧 유산(流散)이 없고, 만일 유산이 없으면 곧 모임이 없고, 만일 법이 모임 없으면 곧 법성이 어김이 없으며, 만일 법성이 어김이 없으면 곧 모든 곳에 다 수순하고, 만일 모든 곳에 수순하면 곧 법의 자성이 움직임이 없으며, 만일 법의 자성이 움직임이 없으면 곧 법의 자성이 소득이 있고, 만일 법의 자성이 소득이 있으면 곧 조그만 법도 결택(決擇)할 것이 없나니, 왜냐하면 인연에서 생긴 성품임을 마땅히 알기 때문이다.
만일 인연에서 생겼다면 성품은 곧 필경 무생이요, 만일 필경 무생이면 곧 적정(寂靜)을 얻고, 만일 적정을 얻으면 곧 일체 법의 작의가 다 의지함이 없으며, 만일 일체 법의 작의가 다 의지함이 없으면 곧 전혀 의지함이 없고, 만일 의지함이 없으면 곧 얻음도 없고 얻지 않음도 없으며, 만일 얻음도 없고 얻지 않음도 없으면 곧 법이 항상 머물게 되며, 만일 법이 항상 머물게 되면 곧 깊고 견고한 법과 상응하고, 만일 깊고 견고한 법과 상응하면 곧 조그만 법도 머물 수 없고, 또한 불법(佛法)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성(空性)을 깨닫기 때문이다.
만일 공성을 깨달으면 그것은 곧 보리(菩提)이니, 이와 같이 공(空)과 상이 없음[無相]과 원이 없음[無願]과 지음이 없음과 집착 없음과 남이 없음과 취함이 없음과 의지함이 없음을 다 깨닫기 때문에 그것이 곧 보리이니, 보리는 깊고 견고한 법과 상응하기 때문에 상응이라는 이름이 건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고 낮음이 없는 법과 상응하고 지음이 없고 지음이 없지도 않은 법과 상응하며, 결박이 없고 해탈이 없는 법과도 상응하고, 한 성품이 없고 많은 성품이 없는 법과도 상응하며, 옴이 없고 감이 없음과도 상응하면 그것은 곧 깊고 견고한 법과 상응하는 것이다.
만일 깊고 견고한 법과 상응하면 그것은 곧 상응할 것이 없고, 또한 끊을 것도 없으며, 다시 증과(證果)할 것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의 법은 본래 자성이 밝은데 다만 객진(客塵)의 번뇌에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자성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니, 만일 자성이 밝으면 곧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으면 곧 대치(對治)할 것이 없을 것이니, 이른바 대치와 번뇌를 다 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미 깨끗해진 것도 없고, 장차 깨끗해질 것도 없어서 청정을 떠나지 않음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만일 청정하면 그것은 곧 무생(無生)이요, 만일 무생이면 곧 움직임이 없으며, 만일 움직임이 없으면 곧 모든 기쁨을 끊고, 일체 사랑함도 다 역시 단멸할 것이요, 만일 모든 사랑이 멸하면 그것은 곧 무생이요, 만일 법이 무생이면 이것은 곧 보리이며, 만일 보리이면 곧 평등이요, 만일 평등이면 곧 진여이며, 만일 진여이면 곧 유위ㆍ무위의 모든 법이 다 머무름이 없고, 만일 진여 가운데 저 유위와 무위의 법이 없으면 곧 두 시설이 없을 것이며, 만일 유위와 무위의 두 시설이 없으면 그것은 곧 진여요, 만일 그것이 진여이면 곧 다른 진여가 없고, 만일 다른 진여가 없으면 곧 종류의 진여가 없으며, 종류의 진여가 없으면 곧 오는 진여가 없고, 만일 오는 진여가 없으면 가는 진여가 없으며, 만일 가는 진여가 없으면 곧 말하는 바와 같은 진여일 것이다.
만일 말과 진여라면 그것은 곧 무생진여요, 만일 무생진여이면 곧 더럽고 깨끗함이 없을 것이며, 만일 더럽고 깨끗함이 없으면 곧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고, 만일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면 곧 열반 평등이며, 만일 열반 평등이면 곧 생사가 없고 열반도 없으며, 만일 생사도 없고 열반도 없으면 곧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으며, 만일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없으면 곧 상ㆍ중ㆍ하의 법이 없고, 만일 상ㆍ중ㆍ하의 법이 없으면 그것은 곧 진여로서 진여라는 이름이 이로써 건립된다.
이것은 진여라 하고, 또한 실성(實性)이라고도 하며, 이것을 실성(實性)이라 하고, 또한 여성(如性)이라고도 하며, 이것을 여성이라 하며, 또한 곧 진여라고 한다.
진여는 본래 나와 둘이 아니며, 또한 종류가 없는 것이다. 둘이 없다는 뜻은 곧 보리이니, 보리란 깨달음의 뜻이다. 이 말하는 뜻은 곧 세 가지 해탈문을 증득해 들어가는 지혜이며, 일체 법을 연설하는 지혜이며, 일체 법은 3세에 평등함을 깨닫는 것이요, 일체 법은 깨뜨려짐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하는 뜻은 곧 뜻이 없고 음성이 없으며, 기록이 없고 나타냄과 나타냄에서 일어남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지혜라 한다. 이른바 뜻이 앎을 따르는 지혜요, 의식이 앎을 따르는 지혜이다. 이 말하는 지혜의 뜻은 곧 여성(如性)의 지혜의 뜻이요, 의식이 앎을 따르는 지혜의 뜻이다.
이와 같이 승의(勝義)는 곧 법의 성품이니, 저 법성의 뜻은 곧 뜻이 앎을 따르는 지혜요, 의식이 앎을 따르는 지혜요, 승의가 앎을 따르는 지혜이다. 그 법성과 같음은 곧 그 뜻과 같음이요, 만일 법성이면 곧 법은 머무는 성품이며, 법은 고요한 성품이다. 그 법의 고요함은 곧 변함이 없나니, 만일 변함이 없다면 곧 글과 뜻이 다 평등하고, 만일 글과 뜻이 평등하면 곧 둘이 없는 뜻이 평등하며, 만일 그 뜻이 평등하면 뜻의 의식도 평등하나니, 이것이 곧 둘이 없는 문에 들어가는 평등의 지혜이며, 이로 말미암아 세속제와 승의제가 다 평등하며, 세속제의 뜻이 평등하기 때문에 곧 공의 뜻과 평등의 성품이 평등하고, 만일 공과 성품의 뜻이 평등하면 그 때문에 곧 보특가라(補特伽羅)의 평등한 성품이 평등하며, 만일 보특가라가 평등하다면 그 때문에 곧 법의 평등의 성품이 평등하다. 만일 법이 평등하면 그 때문에 곧 신해와 평등의 성품이 평등하고, 만일 신해가 평등하면 그것을 깨닫기 때문에 이것은 곧 보리이니라.
묘길상이여, 만일 색의 평등한 성품에 집착이 있고 걸림이 있으면 곧 눈에 걸림이 있나니, 색과 눈의 자성의 지혜에는 걸림이 없기 때문이요, 만일 모든 봄에 집착이 있고 걸림이 있으면 곧 몸에 걸림이 있나니, 모든 견취(見趣)와 몸 가운데의 자성의 공의 지혜에는 걸림이 없기 때문이며, 만일 깊고 견고하지 않은 작의에 집착이 있고 걸림이 있으면 곧 법의 광명에 걸림이 있나니, 깊고 견고한 작의와 모든 법의 자성이 공함을 관찰하는 지혜는 걸림이 없기 때문이요, 만일 의혹과 더러움에 집착이 있고 걸림이 있으면 곧 해탈에 걸림이 있나니, 신해와 해탈과 여실한 지혜에 걸림이 없기 때문이요, 만일 게으름과 더러움에 집착이 있고 걸림이 있으면 곧 현재 견고한 정진에 걸림이 있나니, 말한 바와 같은 법의 깨달은 성품은 걸림이 없기 때문이며, 만일 모든 장애에 집착이 있고 걸림이 있으면 곧 7각지(覺支)의 법에 걸림이 있나니, 장애가 없는 해탈한 지혜에는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알아야 한다. 일체 법은 다 자성이 청정하지마는 다만 인연의 화합으로 말미암아 변할 뿐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일체 법의 염인(染因)과 정인(淨因)을 잘 알아야 하나니, 염인이거나 정인이거나 다 청정하면 거기에 곧 집착이 없게 될 것이다. 이른바 나[我]의 일으킴과 견(見)의 일으킴은 다 염인이요, 무아(無我)의 법에 들어가 인욕하면 그것은 정인이며, 나와 나의 소견은 염인이요, 안으로 고요하고 밖으로 행이 없으면 그것은 정인이며, 탐욕과 분노와 해침과 구함[尋]은 염인이요, 자비희사(慈悲喜捨)로 사찰법(伺察法)에 들어가 인욕하면 그것은 정인이며, 4전도(顚倒)는 염인이요, 4념처(念處)는 정인이며, 5개(蓋)는 염인이요, 5근(根)은 정인이며, 6처(處)는 염인이요, 6념(念)은 정인이며, 7부정법(不正法)은 염인이요, 7각지법(覺支法)은 정인이며, 8사법(邪法)은 염인이요, 8정법(正法)은 정인이며, 9뇌처(惱處)는 염인이요, 9차제정(次第定)은 정인이며, 10불선업도(不善業道)는 염인이며, 10선업도는 정인이다. 통틀어 말하면 일체의 불선의 작의는 모두 염인이요, 일체의 선의 작의는 다 정인이다.
만일 염인이거나 정인이거나 그 일체의 법은 자성이 다 공이어서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으며, 길러줌도 없고, 보특가라도 없고 주재(主宰)도 없어서 섭수도 없고 지음도 없으며, 허깨비와 같아 상이 없고, 안의 마음이 고요하다. 만일 안이 고요하면 그것은 곧 두루 고요하고, 만일 두루 고요하면 곧 자성이며, 만일 법의 자성이면 곧 얻을 바가 없고, 만일 얻을 바가 없으면 곧 의지가 없으며, 만일 의지가 없으면 곧 허공과 같다. 염정의 저 일체 법은 다 허공과 같다. 그러나 저 허공은 또한 무너지지 않는 법의 성품이다. 왜냐하면 묘길상이여, 이 가운데에는 생이거나 멸이거나 조그만 법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묘길상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그렇다면 여래께서 증득하신 보리는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묘길상이여, 여래는 근본이 없고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보리를 얻었느니라.”
묘길상이 아뢰었다.
“무엇을 근본이라 하며, 무엇을 머무름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길상이여, 있는 몸을 근본이라 하고, 허망한 분별에 의지하는 것을 머무름이라 한다.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보리가 평등하기 때문에 그 지혜가 모든 법에 평등하나니, 그러므로 근본이 없다 하고 머무름이 없다고 한다. 여래께서는 그러하기 때문에 현재에 정각을 이루신 것이다.
묘길상이여,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적정(寂靜)하고 근적(近寂)하다. 어떤 것을 적정이라 하며, 어떤 것을 근적이라 하는가? 안을 적정이라 하고, 밖을 근적이라 한다. 왜냐하면 눈이 공이기 때문에 나[我]와 내 것[我所]의 자성도 공이니 이것을 적정이라 하며, 눈의 공임을 알고는 색을 취하지 않나니 이것을 근적이라 한다. 귀가 공이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의 자성도 공이니 이것을 적정이라 하며, 귀의 공임을 알고는 소리를 취하지 않나니 이것을 근적이라 한다.
코가 공이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의 자성도 공이니 이것을 적정이라 하고, 코의 공임을 알고는 냄새를 취하지 않나니 이것을 근적이라 한다. 혀가 공이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의 자성도 공이니 이것을 적정이라 하고, 혀의 공임을 알고는 맛을 취하지 않나니 이것을 근적이라 한다. 몸이 공이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의 자성도 공이니 이것을 적정이라 하고, 몸의 공임을 알고는 접촉을 취하지 않나니 이것을 근적이라 한다. 뜻이 공이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의 자성도 공이니 이것을 적정이라 하고, 뜻의 공임을 알고는 법을 취하지 않나니 이것을 근적이라 하느니라.
묘길상이여, 보리의 자성도 밝으며, 마음의 자성도 밝다. 무엇 때문에자성이 밝다 하는가? 이른바 자성은 오염이 없기 때문에 허공과 같으며, 허공의 자성은 다 두루하여 허공의 자성과 같나니, 필경 자성(自性)이 본래 밝기 때문이니라.
또 묘길상이여, 보리는 들임[入]도 없고 냄[出]도 없다. 무엇을 들임도 없고 냄도 없다 하는가? 이른바 섭취함이 없기 때문에 들임이 없다 하고, 버림이 없기 때문에 냄이 없다 한다. 여래는 들임도 없고 냄도 없음을 증득하고 그 증득함과 같이 곧 진여와 함께하여 피차가 없나니, 모든 법이 피차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현재에 정각을 이루신 것이니라.
또 묘길상이여, 보리는 상이 없고 반연이 없다. 어떤 것을 상이 없다 하며, 반연이 없다 하는가? 이른바 안식(眼識)은 얻는 바가 없나니 이것을 상이 없다 하고, 색은 보임이 없나니 이것을 반연이 없다 한다. 이식(耳識)은 얻음이 없나니 이것을 상이 없다 하고, 소리는 들림이 없나니 이것을 반연이 없다 한다. 비식(卑識)은 얻음이 없나니 이것을 상이 없다 하고, 냄새는 맡아짐이 없나니 이것을 반연이 없다 한다. 설식(舌識)은 얻음이 없나니 이것을 상이 없다 하고, 맛은 맛보임이 없나니 이것을 반연이 없다 한다. 신식(身識)은 얻음이 없나니 이것을 상이 없다 하고, 접촉은 깨달아짐이 없나니 이것을 반연이 없다 한다. 의식(意識)은 얻음이 없나니 이것을 상이 없다 하고, 법은 분별됨이 없나니 이것을 반연이 없는 것이라 한다.
묘길상이여, 이 평등은 모두 이 모든 성인의 경계요, 모든 삼계는 성인의 경계가 아니니, 그러므로 성인의 경계를 행해야 하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보리는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아니니 3세가 평등하기 때문이요, 3륜(輪)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3륜이란, 이른바 과거의 마음은 구르지 않고, 미래의 알음알이[識]는 취함이 없으며, 현재의 뜻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저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는 비록 머무르는 곳에 있으나 분별이 없으면서 분별을 떠나지 않고, 헤아림[計度]이 없으면서 헤아림을 떠나지 않는다. 과거에 이미 지음이 없고, 미래의 받아들임이 없으며, 현재의 희론(戱論)이 없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보리는 몸으로 얻을 것이 아니니 함이 없기 때문이다. 몸으로 얻을 것이 아니란, 이른바 안식이 알지 못하고, 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이 알지 못하나니,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로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곧 이것이 함이 없음이다. 함이 없음이란, 이른바 남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며 멸함이 없고 3륜이 청정한 것이니, 그것이 함이 없음과 같다. 유위도 그렇게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체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며, 법이 자성이 없으므로 곧 법은 둘이 없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보리는 차별이 없는 구(句)이다. 어떤 것을 차별이 없다 하며, 어떤 것을 구(句)라 하는가? 이른바 생각 없음이 곧 차별 없음이요 진여가 곧 구이며, 머무름 없음이 곧 차별 없음이요 법계가 곧 구이며, 갖가지의 성품 없음이 곧 차별 없음이요 실제가 곧 구이며, 반연됨이 없음이 곧 차별 없음이요 움직임 없음이 곧 구이며, 공이 곧 차별 없음이요 상 없음이 곧 구이며, 심사(尋伺) 없음이 곧 차별 없음이요 생각 없음이 곧 구이며, 구원(求願) 없음이 곧 차별 없음이요 중생 없음이 곧 구이며, 중생이 자성 없음이 곧 차별 없음이요 허공이 곧 구이며, 소득 없음이 곧 차별 없음이요 무생(無生)이 곧 구이며, 멸함 없음이 곧 차별 없음이요 무위가 곧 구이며, 소행 없음이 곧 차별 없음이요 보리가 곧 구이며, 적지(寂止)가 곧 차별 없음이요 열반이 곧 구이며, 취함 없음이 곧 차별 없음이요 무생(無生)이 곧 구이니라.
또 묘길상이여, 보리는 몸이 증득할 것이 아니니, 왜냐하면 몸은 비록 생김이 있으나 생각이 없고 움직임이 없어 초목이나 기왓장과 같으며, 그 마음은 허깨비처럼 공허하여 실답지 않고 지음이 없기 때문이다. 묘길상이여, 만일 몸과 마음을 여실히 깨달으면 그것이 곧 보리이며, 세속의 행은 승의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승의제 가운데에는 몸도 마음도 없으며, 법도 없으며 법 아닌 것도 없으며, 실도 없고 실 아닌 것도 없으며, 진(眞)도 없고 망(妄)도 없으며, 말도 없고 말 아닌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법이 다 보리이다. 왜냐하면 보리가 처소가 없고, 말로 표현할 것이 아니니, 허공이 처소가 없기 때문에 또한 지음도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어서 말로 표현할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여래는 보리가 처소가 없고 지음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실답고 이치답게 자세히 관찰할 때에는 저 일체 법은 다 말이 없다는 것이다. 보리도 그와 같아서 여실히 관찰할 때에는 말이 없다. 왜냐하면 말은 실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기 때문이다.
또 묘길상이여, 보리는 취함이 없고 간직함이 없다. 어떤 것을 취함이 없다 하며, 어떤 것을 간직함이 없다 하는가. 눈을 잘 알기 때문에 취함이 없다하고, 빛깔에 얻음이 없음을 간직함이 없다 하며, 귀를 잘 알기 때문에 취함이 없다 하고, 소리에 얻음이 없음을 간직함이 없다 하며, 코를 잘 알기 때문에 취함이 없다 하고, 냄새에 얻음이 없음을 간직함이 없다 하며, 혀를 잘 알기 때문에 취함이 없다 하고, 맛에 얻음이 없음을 간직함이 없다 하며, 몸을 잘 알기 때문에 취함이 없다 하고, 감촉에 얻음이 없음을 간직함이 없다 하며, 뜻을 잘 알기 때문에 취함이 없다 하고, 법에 얻음이 없음을 간직함이 없다 한다.
여래는 이 취함이 없고 간직함이 없기 때문에 보리를 현재에 증득하고, 보리를 증득하고는 눈이 취함이 없고 색이 취함이 없으며 눈의 알음알이[眼識]에 머무름이 없다. 귀가 취함이 없고 소리에 얻음이 없으며 귀의 알음알이에 머무름이 없다. 코가 취함이 없고 냄새에 얻음이 없으며 코의 알음알이에 머무름이 없다. 혀가 취함이 없고 맛에 얻음이 없으며 혀의 알음알이에 머무름이 없다. 몸이 취함이 없고 접촉에 얻음이 없으며 몸의 알음알이에 머무름이 없다. 뜻이 취함이 없고 법에 얻음이 없으며 뜻의 알음알이에 머무름이 없고, 알음알이에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곧 여래ㆍ응공ㆍ정등정각이라 하는 것이다.
또 묘길상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중생들은 네 가지 법을 그 마음에 둔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 등을 일체 중생들은 그 마음에 둔다. 즉 중생들이 그 네 가지 법을 마음에 두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불생불멸과 아는 바 없음을 말씀하시고, 보리를 건립하여 공이라 하셨으며, 보리가 공이기 때문에 일체 법이 공이요, 여래도 공이며, 이 공 때문에 정각을 이루신 것이다.
묘길상이여, 공이기 때문에 증득한 보리도 공이라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법에는 한 이지(理智)가 있으니, 이른바 공성(空性)이며, 보리가 공이 아니기 때문에 보리는 둘이 없다. 그러므로 보리와 공은 다 종류가 없으니, 왜냐하면 저 모든 법은 본래 둘이 없기 때문에 형상이 없고 종류가 없으며, 이름이 없고 모양이 없으며,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를 떠났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행이 없으면서 행하지 않음이 없고, 쌓임이 없으며 문자가 없고 망실(忘失)됨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공이어서 취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승의제가 아니니, 이른바 승의제 가운데에는 얻을 수 있는 법이 없는 것을 공이라 하는 것이다.
묘길상이여, 비유하면 허공과 같기 때문이니, 허공이라 하는 것은 말이 없기 때문에 허공이라 하는 것과 같다. 묘길상이여, 공도 또한 그와 같아서 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른바 말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만일 이렇게 알면 일체 법은 이름이 없는 것이니, 이름이 없기 때문에 저 일체 법을 임시로 이름을 시설한 것이다.
묘길상이여, 이름은 방위에 있지 않으면서 방위를 떠나지 않으며, 이름이 방위에 있지 않으면서 방위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법의 이름을 말하지마는, 그 말하는 법도 방위에 있지 않으면서 방위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저 일체 법도 또한 그와 같다. 여래는 본래 그와 같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일어남도 없고 상이 없으며,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를 떠났고 문자도 없고 음성이 없음을 알며, 그 아는 대로 해탈도 그러하나니, 묘길상이여, 일체 법은 결박도 해탈도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대승입제불경계지광명장엄경 제4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묘길상이여, 보리는 허공과 같나니, 이른바 허공은 높고 낮음이 없다. 보리도 그와 같아서 높고 낮음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정등각을 이루셨으며, 비록 정등각을 이루셨으나 티끌만한 조그만 법도 높거나 낮음이 시설이 없나니, 이런 법을 이와 같이 알면 그것은 여실한 지혜이다.
묘길상이여, 무엇 때문에 그것을 여실한 지혜라 하는가. 이른바 일체 법은 근본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그 실답지 않은 성질조차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실다운 성질이 있다면 그것은 멸하는 법이니, 그것이 비록 생은 있더라도 주재(主宰)가 없고, 또한 섭수도 없느니라. 묘길상이여, 만일 주재가 없고 섭수가 없는 법이라면 그것은 멸하는 법이니, 이런 모든 법은 생기거나 멸하거나 그것은 다 인연으로 변하는 것이지마는 거기에는 조그만 법도 변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부처님 여래께서는 모든 법에 대해서 단멸상(斷滅相)을 말씀하시지 않느니라.
다시 묘길상이여, 보리란 여설구(如說句)이다. 무엇 때문에 여설구라 하는가? 여설구란 곧 보리이니, 그 보리와 같이 색ㆍ수ㆍ상ㆍ행ㆍ식도또한 그러하여 진여를 떠나지 않고, 그 보리와 같이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과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도 또한 그러하여 진여를 떠나지 않으며, 그 보리와 같이 안계ㆍ색계ㆍ안식계와 이계ㆍ성계ㆍ이식계와 비계ㆍ향계ㆍ비식계와 설계ㆍ미계ㆍ설식계와 신계ㆍ촉계ㆍ신식계와 의계ㆍ법계ㆍ의식계도 그러하여 진여를 떠나지 않고, 그 보리와 같이 지계ㆍ수계ㆍ화계ㆍ풍계도 또한 그러하여 진여를 떠나지 않는다.
이런 여러 법을 이렇게 시설하나니, 그 시설이란 이른바 온(蘊)ㆍ처(處)ㆍ계(界)이니, 이로 말미암아 여래께서 등정각을 이루시고 이루어진 정각은 뒤바뀐 법을 떠난다. 그 먼저 법과 같이 뒤의 법도 그러하고, 가운데 법도 그러하여 전제(前際)는 생기지 않고, 후제는 가지 않으며, 현세의 성품[中際]은 떠난다. 이런 법을 여소설구라 하며, 그 한 법과 같이 많은 법도 그러하고, 그 많은 법과 같이 한 법도 그러하니라.
묘길상이여, 한 성품이거나 많은 성품이거나 다 얻을 것이 없고, 상이 있거나 상이 없거나 들어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는 것이다. 무엇을 상이 있다 하며, 무엇을 상이 없다 하는가? 이른바 상이란, 즉 모든 선법을 일으키는 것이요, 이른바 상이 없음이란 즉 일체 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상이란, 이른바 마음의 머무는 분위(分位)가 없는 것이요, 상이 없음이란 즉 무상삼마지(無相三摩地)의 해탈 법문이다. 또 상이란 즉 일체 법을 생각하고 헤아리며 셈하고 관찰하는 것이요, 상이 없음이란 이른바 헤아림을 초월한 것이다. 어떤 것을 헤아림을 초월함이라 하는가. 이른바 분별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 상이란 즉 유위의 관찰이요, 상이 없음이란 곧 무위의 관찰이니라.
다시 묘길상이여, 보리란 곧 무루(無漏)요 무취(無取)이다. 어떤 것을 무루라 하고, 어떤 것을 무취라 하는가. 무루란 이른바 네 가지 유루의 법을 떠나는 것이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욕루(欲漏)요, 둘째는 유루(有漏)이며, 셋째는 무명루(無明漏)요, 넷째는 견루(見漏)이다. 무취란, 이른바 네 가지 집착하는 법을 떠나는 것이니, 그 네 가지란, 첫째는 욕취(欲取)요, 둘째는 견취(見取)이며, 셋째는 계금취(戒禁取)요, 넷째는 아어취(我語取)이다. 이런 4취는 다 무명의 덮음으로 말미암아 애법(愛法)이 불어나 서로 취착(取著)하는 것이다.
묘길상이여, 만일 처음에 아어취의 근본을 잘 알면 곧 나[我]가 청정하고, 나가 청정하면 일체 중생의 청정함을 알며, 나가 청정하기 때문에 저 일체 중생이 청정하고, 일체 중생이 청정하면 법에 둘이 없고 두 종류가 없으며, 그 두 이치가 없으면 곧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느니라.
묘길상이여, 만일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면 곧 변전할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가 없고, 만일 변전할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가 없으면 곧 분별이 없으며, 만일 분별이 없으면 곧 깊고 견고한 작의에 상응하여 무명이 일어나지 못하며, 만일 무명이 일어나지 못하면 곧 12유지(有支)가 생장하지 못하고, 만일 12유지가 생장하지 못하면 곧 법이 생기지 않으며, 만일 법이 생기지 않으면 곧 법이 결정되고, 만일 법이 결정되면 곧 조복의 이치요, 만일 조복의 이치면 곧 그것은 승의이며, 만일 그것이 승의이면 곧 보특가라의 이치를 떠나는 이치요, 만일 보특가라를 떠나는 이치이면 곧 말할 수 없는 이치이며, 만일 말할 수 없는 이치이면 곧 연생(緣生)의 이치요, 만일 연생의 이치이면 곧 법의 이치며, 만일 법의 이치면 곧 여래의 이치이다.
이와 같이 말한 대로 만일 연생을 보면 곧 법을 볼 수 있고, 만일 법을 볼 수 있으면 곧 여래를 볼 수 있다. 저 모든 소견을 이치답게 관찰할 때에는 거기에는 볼 수 있는 조그만 법도 없느니라. 묘길상이여, 어떤 것을 조그만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마음에 반연되는 것이니, 만일 마음에 반연되는 것이 없으면 곧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법으로 말미암아 여래는 등정각을 이룬 것이니,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이니라.
다시 묘길상이여, 보리란 바로 청정의 뜻이요, 무구(無垢)의 뜻이며, 무착(無著)의 뜻이다. 어떤 것을 청정이라 하고, 어떤 것을 무구라 하며, 어떤 것을 무착이라 하는가? 이른바 공해탈문(空解脫門)이 곧 청정이요,
무상(無相)해탈문이 곧 무구이며, 무원(無願)해탈문이 곧 무착이다. 무생(無生)이 바로 청정이요, 무작의(無作意)가 바로 무구이며, 무기(無起)가 바로 무착이다. 자성(自性)이 바로 청정이요, 원정(圓淨)이 바로 무구이며, 명량(明亮)이 바로 무착이다. 희론(戱論) 없음이 바로 청정이요, 희론을 떠남이 바로 무구이며, 희론 그침이 바로 무착이다. 진여가 바로 청정이요, 법계가 바로 무구이며, 실제가 바로 무착이다. 허공이 바로 청정이요, 비고 넓음이 바로 무구요, 광대함이 바로 무착이다. 안의 법을 앎이 바로 청정이요, 밖으로 소행 없음이 바로 무구이며, 안팎에 소득 없음이 바로 무착이다. 온법(蘊法)을 앎이 바로 청정이요, 법계의 자성이 바로 무구이며, 처법(處法)을 떠남이 바로 무착이다. 과거를 다한 지혜가 바로 청정이요, 미래의 무생지(無生智)가 바로 무구이며, 현재 법계에 안주하는 지혜가 바로 무착이다.
묘길상이여, 이와 같은 청정과 무구와 무착의 모든 뜻을 한 글귀에 다 포섭할 수 있으니, 이른바 적정(寂靜)이라는 글귀이다. 만일 적정이라면 그것은 곧 변적(徧寂)이요, 변적은 곧 근적(近寂)이며, 근적은 곧 적지(寂止)요, 적지라면 이것은 바로 큰 모니의 법이니라.
다시 묘길상이여, 저 허공과 같이 보리도 또한 그러하고, 저 보리와 같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며, 그 모든 법과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하고, 그 중생과 같이 찰토(刹土)도 또한 그러하며, 그 찰토와 같이 열반도 또한 그러하니라.
묘길상이여, 이 말은 곧 열반의 평등이, 일체 법의 마지막이 되는 변제(邊際)의 청정한 인(因)은 대치(對治)가 없고 대치를 떠난 인(因)으로서 본래 청정하고 본래 무구이며 본래 무착이라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일체 법의 이런 상을 잘 아시기기 때문에 현재에 정각을 이루시고, 그런 뒤에 모든 중생계를 관찰하시고서 청정하고 때묻지 않고 집착이 없이 자재하게 설하는 법문(法門)을 건립하여 이 이름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심을 굴리시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바로 어떤 것을 보살이 행할 바라 하고, 보살의 승행(勝行)이라 하는가? 이른바 만일 보살이 다함이 없거나 다하지 않음이 없거나, 생함이 없거나 멸함이 없으면, 필경에 상(相)을 다하고 받아들이는 바가 없게 된다. 그런데도 또한 무너지지 않고 필경에 생겨나지 않느니라. 묘길상이여, 보살이 만일 이와 같이 행하면 이것을 보살의 승행이라 하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보살은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갔으니 여기 행이 없으며, 미래의 마음은 아직 이르지 않았으니 여기 행이 없으며, 현재의 마음은 머물지 않으니 여기 행이 없다. 보살은 과거나 미래와 현재의 모든 마음에 다 집착이 없다. 보살이 만일 이렇게 행하면 이것을 보살의 승행이라 하느니라.
또 보시의 법에 있어서 모든 부처님 여래와 모든 보살은 그 둘이 없고 두 종류가 없다. 보살이 만일 이렇게 행하면 이것을 보살의 승행(勝行)이라 한다. 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에 있어서 그와 같아서 부처님 여래와 모든 보살은 그 둘이 없고 두 종류가 없다. 보살이 만일 이렇게 행하면 이것을 보살의 승행이라 하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보살은 색(色)과 공(空)을 행하지 않고, 색과 불공을 행하지 않는다. 보살이 만일 이렇게 행하면 이것을 보살의 승행이라 한다. 왜냐하면 색이 곧 공이요, 색의 자성이 공이기 때문이다. 수ㆍ상ㆍ행ㆍ식도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식(識)과 공을 행하지 않고 식과 불공도 행하지 않나니, 만일 보살이 이렇게 행하면 이것을 보살의 승행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른바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묘길상이여, 이 속에는 있어야 할 조그만 법도 없다. 만일 알거나 만일 끊거나 만일 닦거나 만일 깨치거나 다 말미암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함이라 하며, 이렇게 하여 곧 끝까지 다한 상이 되나니, 만일 필경의 다함이면 곧 다할 것이 없고, 다함없는 것도 또한 다함이 없다. 왜냐하면 여소설(如所說)이 다했기 때문이며, 만일 여소설이 다하면 곧 다할 법이 없고, 만일 다할 법이 없으면 곧 무위이며, 만일 무위이면 곧 생도 멸도 없다. 만일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거나 만일 세상에 나오시지 않거나 법성(法性)은 항상 머물고, 법이 머물면 곧 이것은 법계이다. 법계가 머물기 때문에 지혜를 굴릴 것이 없고, 또한 굴림이 없는 것도 아니며, 지혜를 굴릴 것도 없고, 굴림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만일 이렇게 법리(法理)를 깨치면 곧 무루와 무생과 무멸을 얻으리니, 이것을 누진(漏盡)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묘길상이여, 비록 세속의 음성과 문자를 모두 모아 시설하더라도 거기서 생하고 멸하는 조그만 법도 없는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 때 묘길상 동진 보살마하살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묘한 가타(伽陀:게송)로 찬탄하였다.
형상과 나타내는 빛깔 없고 모양도 없나니
이 가운데에는 멸함도 없고 또한 생김도 없네.
머무름도 없거니와 또한 다시 근본 없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나감도 들어옴도 없고
또한 다시 저 모든 나뉜 위치[分位]도 없어
여섯 곳의 문[六處門]을 이미 능히 해탈하였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일체의 법 가운데서 머무르는 곳이 없고
성품이 있거나 성품이 없거나를 다 멀리 떠나
모든 행이 평등하여 다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이미 삼계에서 벗어나고
허공이 평등한 성품에 머물며
세간의 모든 욕심에 마음이 물들지 않았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삼마혜다(三摩呬多)에 항상 편안히 머물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역시 다시 그러하네.
모든 위의의 일이 묘하고 엄숙하게 이루어졌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평등하게 왔다가 평등하게 가고
평등한 성품 가운데 묘하게 안주하네.
평등한 성품의 법의 문 무너지지 않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대성께서 평등한 성품에 잘 들어가고
모든 법이 모두 등인(等引:禪定)의 마음에 머무네.
상이 없는 묘한 법의 문에 두루 들어가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대성께서는 머묾도 없고 반연하는 바 없고
정(定) 가운데 지혜의 봉우리 높이 쌓고
모든 법을 두루 원만히 이루었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중생의 위의와 색상(色相)
언어와 음성 또한 그와 같이
두루 찰나간에 시현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대성께선 이미 명색(名色)을 떠났고
온법(蘊法)과 계법(界法)도 또한 두루 끊었네.
다시 상이 없는 문에 잘 들어가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대성께서 모든 상을 잘 떠났고
모든 상의 경계 역시 멀리 떠났네.
이미 상이 없는 문에 잘 들어갔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사유하는 바도 없고 분별도 없고
깨끗한 뜻 또한 다시 머무는 바 없네.
모든 작의도 없고 생각이 일어남도 없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비유하면 허공이 간직함이 없는 것과 같이
이미 희론과 집착하는 바 없음을 떠났고
그 마음 평등하여 또한 공(空)과 같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비유하면 허공이 가[邊]가 없는 것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의 성품 역시 그러하네.
이미 3세의 문을 초월하였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모든 부처님은 허공의 상(相)과 같으니
곧 이 허공 역시 상이 없네.
이미 일과 인(因)을 잘 해탈하였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일체 법 가운데 의지가 없음이
물속의 달이 취할 바 없음과 같네.
아상(我相)도 없고 또한 음성도 없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대성께서는 온법(蘊法)에 의지하지 않고
계(界)와 처(處)의 모든 법 역시 그러하네.
이미 전도된 마음을 잘 해탈하였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는 이미 두 치우침을 떠나고
또한 다시 나[我]라는 견해를 끊어 없애어
법계에 대한 평등한 마음이 원만히 이루어졌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색상(色相)과 명수(名數)를 이미 해탈하였고
또한 다시 바르지 못한 법을 멀리 떠나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평등한 마음이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모든 마(魔)의 법을 이미 능히 모두 초월하였고
일체의 법 속을 모두 환히 통달하고
묘하게 장애가 없는 법의 문에 들어갔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바른 지혜는 모든 법의 있음도 말하지 않고
또한 다시 모든 법의 없음도 말하지 않고
말의 길이 없고 그것이 발생하지도 않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성인께서는 두 가지 법에 의지하지 않고
오래전에 이미 아만(我慢)의 깃대를 꺾고
둘과 둘이 없는 법의 문을 해탈했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몸과 말과 뜻의 모든 허물을
큰 성인께서는 오래전에 이미 끊어 없앴고
비유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는 굴림도 없고 또 깨침도 없고
일체의 허물을 모두 멀리 떠나고
지혜가 길잡이 되어 모두 두루 행하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번뇌가 없는 깨끗한 생각이 가장 미묘하여
실답고 실답지 않은 법을 모두 알면서도
매임과 집착이 없고 생각도 또한 없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는 마음에 반연하는 바 없으나
일체의 마음을 능히 두루 다 알면서도
나와 남이라는 생각이 생기지도 않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반연하는 바 없는 가운데 반연하는 바 있어
일체의 마음에 미혹하여 집착하지 않고
장애가 없는 법이 이미 원만히 밝았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는 마음에 반연하는 바 없고
또한 다시 제 성품에 소유가 없고
마음이 없는 평등이 원만히 이루어졌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는 지혜와 법에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찰토(刹土)를 능히 두루 관찰하며
일체 중생들의 행도 그와 같아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에 얻는 바 없고
이 가운데서도 또한 다시 끝까지 없으면서
일체의 법을 바로 두루 다 아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일체의 법은 모두 허깨비와 같은데
이 허깨비도 또한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허깨비 같은 법의 문을 이미 잘 해탈했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정각(正覺)께서는 비록 세간에서 살아가지만
세간의 법에 의지하지 않고
다시 세간의 분별하는 마음 없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 저 공중을 다님은
공(空)으로 이루어진 공의 경계로 말미암음이니
공과 공 아님은 성인께서 말씀하신 바라.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신통을 나타내고 요술 같은 일을 일으킴은
모두 허깨비와 같은 삼마지(三摩地)에 의해서이며
갖가지 성품의 두루 들어가는 문을 떠났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하나도 아니요 많음도 아닌 성품을 잘 알고
가까이서나 멀리서나 굴리는 바 없고
높음도 없고 낮음도 없는 평등한 마음이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금강(金剛)에 비유할 선정이 현재 앞에 있어
한 찰나 사이에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대애(對礙)가 없는 법의 문에 두루 들어갔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비록 열반을 알더라도 거기에 흔들림 없이
3세(世)를 또한 잘 제어해 항복 받고
가지가지 방편의 문을 두루 원만히 갖추었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저 일체 중생의 무리에 대해
지혜와 방편을 잘 아네.
그런데도 또한 열반의 문에서 움직이지 않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는 상(相)도 없고 깨침도 없으며
이미 희론(戱論) 떠났으며 대애(對礙)도 없고
나[我]가 없기 때문에 대애의 마음 없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이미 의혹을 떠나 아무 허물이 없는데
나[我]와 내 것[我所]이 없는 것도 또한 그렇고
일체의 곳을 바르게 두루 아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대승입제불경계지광명장엄경 제5권
번뇌를 건너신 10력(力)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넓고 크게 두려움 없음을 크게 베푸시는 이에게 머리를 조아리네.
함께하지 않는 모든 법 가운데 잘 머무시나니
세간에서 높고 훌륭한 어르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네.
온갖 결박을 잘 끊는 이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이미 저쪽 언덕에 머무르신 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세상의 모든 고통을 구제하시는 이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나고 죽음에 머무르지 않는 이에게 머리를 조아리네.
중생들의 행을 두루두루 통달해 아시고
일체의 곳에서 뜻과 생각을 떠나시고
마치 연꽃이 더러운 물속에서 물들지 않는 것처럼
깨끗하고 비고 한적하고 침묵함을 항상 친근하시네.
인연 없는 중생을 더러운 바다에서 구제하시는
성사(聖師)의 갖가지 최상의 글귀에 머리를 조아리나니
모든 상(相)의 문을 두루 잘 관찰하시며
어떠한 소원도 구함도 가지심도 없네.
부처님의 큰 위엄스러운 힘은 불가사의하시어
마치 허공이 의지함이 없는 것 같네.
훌륭한 덕의 문을 널리 가지신 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마치 저 묘고산 같은 이에게 머리를 조아리네.
그 때 세존께서는 묘길상 동진 보살마하살을 찬탄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묘길상이여. 그렇고 그렇다, 묘길상이여. 모든 부처님을 색상(色相)을 일으켜 보지 말고, 모든 법에 대해 그 상이 없다고 말하지 말며, 모든 부처님께서 홀로 법계에 계시다고 말하지 말고, 부처님께서 대중 가운데 있다고도 말하지 말라.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은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으며, 공양 받는 것도 없고 공양하는 이도 없다. 모든 부처님 여래에게는 한 성품이라거나 많은 성품이라거나 할 만한 조그만 법도 없다. 부처님께서 보리과를 얻었다고도 말하지 말고, 또한 부처님께 나타낼 수 있는 법이 있다고도 말하지 말라.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으며, 생각하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 부처님께서는 말이 없이 모든 법을 이미 말씀하셨고, 현재에 말씀하시고, 미래에 말씀하실 것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현재에 정각을 이루신 것도 아니요, 또한 정각을 이룰 수 있는 법도 없으며, 또한 모든 부처님께서 더러움을 끊고 깨끗한 것을 깨친 것도 아니다. 비록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떠난 것이니, 왜냐하면 묘길상이여, 일체 법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니라.
다시 묘길상이여, 너희들은 알아야 하나니, 이 경의 공덕은 불가사의하다. 즉 어떤 보살은 삼천대천세계의 티끌 수 같은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다 연각과(緣覺果)를 이루게 하더라도 이 바른 법을 신해하지 않으며,또 만일 어떤 보살은 이 바른 법을 신해한다면, 그가 얻는 복덕은 저 앞의 복덩이에 견주어 넓고 크며 한량없겠거늘, 하물며 스스로 쓰거나 혹은 남에게 쓰게 하면 그 얻는 복덩이는 곱절이고도 더욱 많을 것이다.
또 묘길상이여,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일체 중생 무리로서 만일 난생(卵生)이거나 만일 태생(胎生)이거나, 만일 습생(濕生)이거나 만일 화생(化生)이거나, 만일 색이 있거나 만일 색이 없거나, 만일 생각이 있거나[有想] 만일 생각이 없거나, 만일 생각이 있지 않거나 만일 생각이 없지 않거나, 만일 두발짐승이거나 만일 네발짐승이거나, 만일 발이 없는 중생이거나 만일 발이 많은 중생이거나 저 이런 모든 중생 무리들을 다 세워 사람의 몸을 얻게 하고, 사람의 몸을 얻게 하고는 다 큰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며, 큰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고는 낱낱 보살에게 불가사의한 긍가(殑伽)의 모래 수같이 많은 부처님 국토에서 티끌 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성문 대중을 위해 음식ㆍ의복ㆍ좌구[坐]ㆍ침구와 의약과 모든 오락 도구를 공급하고 공양하게 하고, 긍가의 모래 수같이 많은 겁을 지나 그 모든 부처님들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는 7보의 탑을 만들게 하는데, 너비는 1유순(由旬)이요, 높이는 백 유순이며, 온갖 보배로 계도(界道)를 만들고, 마니(摩尼)ㆍ진주로 뛰어나게 장식하고, 갖가지의 보배 당기ㆍ번기ㆍ일산을 세우고, 자재왕 보배의 묘한 그물로 덮어 갖가지로 장엄하게 한다고 하자.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깊은 마음이 청정하여 이 『입제불경지광명장엄경(入諸佛境界智光明莊嚴經)』의 매우 깊은 정법을 듣고는 이것을 신해하거나 혹은 깨치고,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한 4구(句)의 게송을 남에게 자세히 연설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은 헤아릴 수 없으며, 부처의 지혜를 증득하고 복행(福行)의 뛰어난 사업을 성취하면, 앞의 보살의 보시의 복덩이는 백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천 구지분(俱胝分)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 구지분의 1에도 미치지못하며, 산분(算分)ㆍ수분(數分) 및 비유분(譬喩分) 내지 오파니살담분(烏波尼殺曇分)의 1에도 다 미치지 못하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만일 어떤 재가 보살이 아승기 긍가의 모래 수 같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성문에게 음식ㆍ의복ㆍ좌복ㆍ침구와 의약으로 아승기 긍가의 모래 수 같은 겁 동안 공급하고 공양한다고 하자. 혹 어떤 출가 보살이 계행이 청정하고 깊은 마음을 구족하여 일체의 축산물 중에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한 끼라도 보시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덩이에 비해 저 앞의 복덩이는 백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천 구지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 구지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산분ㆍ수분 및 비유분 내지 오파니살담분의 1에도 다 미치지 못하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삼천대천세계의 티끌 수 같은 출가 보살로서 깊은 마음이 청정한 낱낱 보살이 시방세계의 아승기 긍가의 모래 수 같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성문에게 음식ㆍ의복ㆍ좌복ㆍ침구ㆍ의약 등을 아승기 긍가의 모래 수 같은 겁 동안 공급하고 공양하면, 그 모든 보살이 얻는 복덩이는 그 수가 한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보살로서 재가자나 출가자가 계행을 구족하고 깊은 마음이 청정하여 이 정법을 듣고 신해하여 스스로 쓰고 베끼거나 혹은 남으로 하여금 쓰게 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덩이는 앞의 보살의 보시의 복덩이에 비해 곱절이고도 또한 더욱 많을 것이며, 백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 구지 산수 비유의 1에도 다 미치지 못하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어떤 보살은 삼천대천세계에 7보를 가득 채워 삼천대천세계의 티끌 수 같은 겁 동안 부처님과 보살 등에게 보시하고 공양하고, 만일 어떤 보살은 이 정법에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한 4구게를 잘 깨치면, 이 사람의 얻는 복덩이에 비해 앞 보살의 복덩이는 백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 구지 산수 비유의 1에도 다 미치지 못하느니라.
묘길상이여, 위의 삼천대천세계의 티끌 수 같은 겁 동안의 보시의 복행은 차치하고, 묘길상이여, 설령 아승기 긍가의 모래 수 같은 모든 보살의 낱낱 보살이 다 아승기 긍가의 모래 수 같은 불찰토에서 염부단금(閻浮檀金)으로 된 온갖 보배 나무와 묘한 옷과 광명이 두루한 진주 마니 보배 그물로 덮은 자재왕 마니 보배로 된 누각과 번갯불 광명의 마니 보배로 된 누각과 번갯불 광명의 마니 보배로 도계(道界)를 만들고 뛰어나게 묘한 당기와 번기와 일산을 세워 원만히 만들고는 아승기 긍가의 모래 수 같은 부처님 세존을 날마다 공양하되, 이렇게 아승기 긍가의 모래 수 같은 겁 동안 보시행을 닦더라도 혹 어떤 보살이 이 최상의 매우 깊은 정법에 대해 신해를 내고는……(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한 4구게나마 다른 보살을 위해 이치답게 연설하여 그를 깨닫게 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덩이에 앞의 보살의 보시한 복덩이를 비하면 백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 구지 산수 비유의 1에도 다 미치지 못하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설령 삼계가 이루어진 뒤에 거기에 모든 지옥ㆍ아귀ㆍ축생 세계의 모든 중생이 있을 때 만일 어떤 재가 보살이 그 지옥ㆍ아귀ㆍ축생 세계의 모든 중생들을 다 구제하여 해탈하게 하고는 다 세워 연각과를 이루게 하더라도, 만일 어떤 출가보살이 모든 소[牛]에게……(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한 끼라도 보시한다면, 이 보살이 얻는 복덩이는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설령 시방의 모든 불찰토에 있는 불가설 구지 나유다 백천의 티끌 수 같은 출가 보살의 낱낱 보살이, 시방세계의 낱낱 방위에 있는 10불찰의 불가설 구지 나유다 백천의 티끌 수 같은 모든 부처님 세존과 그 낱낱 부처님과 모든 보살과 성문 대중들에게 10불찰 불가설 구지 나유다 백천 티끌 수 같은 겁 동안 음식ㆍ의복ㆍ좌복ㆍ침구ㆍ의약을 보시하고 공양하고, 저 낱낱 모든 부처님 여래를 위하여 날마다 10불찰 불가설 구지 나유다 백천 티끌 수 같은 세계에 자재왕 마니 묘한 보배를가득 채워 보시하고 공양하더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정법을 신해하고는 소에게……(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한 끼라도 보시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덕에 비하여 앞 보살의 보시의 복덩이는 백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 구지 산수 비유의 1에도 다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정법을 만일 들으면 큰 보살의 큰 지인(智印)에서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니라.
또 묘길상이여, 만일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의 일체 중생을 다 세워 수신행지(隨信行地)에 머물게 하더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세워 수의행지(隨義行地)에 머물게 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만일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의 일체 중생을 세워 수의행지(隨義行地)에 머물게 하더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세워 수법행지(隨法行地)에 머물게 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만일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의 일체 중생을 세워 수법행지에 머물게 하더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세워 수다원과(須陀洹果)에 머물게 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만일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의 일체 중생을 세워 수다원과에 머물게 하더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세워 사다함과(斯陀含果)에 머물게 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만일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의 일체 중생을 세워 사다함과에 머물게 하더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세워 아나함과(阿那含果)에 머물게 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만일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의 일체 중생을 세워 아나함과에 머물게 하더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세워 아라한과(阿羅漢果)에 머물게 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만일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의 일체 중생을 세워 아라한과에 머물게 하더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세워 연각과(緣覺果)에 머물게 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만일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의 일체 중생을 세워 연각과에 머물게 하더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세워 큰 보리심을 내게 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만일 어떤 보살이 시방 일체 세계의 일체 중생을 세워 보리심을 내게 하더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한 중생을 세워 불퇴전위(不退轉位)에 머물게 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설령 보살이 일체 중생을 건립하기 위해 다 불퇴전위에 머물게 하더라도, 만일 어떤 보살이 청정한 마음을 내어 이 최상의 매우 깊은 정법을 바로 신해하고는 스스로 쓰거나 베끼고, 만일 남으로 하여금 쓰게 하며, 혹은 다시 남에게 광대하게 연설하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한 중생을 위해 이 최상의 매우 깊은 정법을 신해하게 하면, 이 보살이 얻는 복덩이는 무량무수하여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 때 세존께서는 두루 대중을 위해 가타를 말씀하셨다.
만일 모든 보살로서
10구지 부처님께 공양하고
바른 법문을 받아 지니되
시간의 한계를 매우 다하고
다시 매우 깊은 법을
사랑하고 즐겨 들으면
그 복은 끝없이 넓어
과보 중에서 제일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로서
신통의 힘으로 시방에 가서
10구지 부처님을
친근하고 공양하며
인간 중의 높은 이와
최상의 모든 정사(正士)들께 두루 예배하며
모든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면
온갖 이락(利樂)을 증진시키리라.
지금 이 매우 깊은 경전은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말씀하신 것이니
만일 다른 사람 위하여
잠깐이라도 연설하면
그것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깨끗한 믿음을 잘 개발하리니
그가 얻은 복의 과보는
광대하고 가장 훌륭하리.
모든 부처님의 큰 자비로
연설하시는 이 정법은
광대한 저 등불 같아서
인천 세계를 두루 비추네.
예리한 슬기 가지고
큰 힘을 구족한 자는
신해의 마음을 잘 내어
빨리 불과(佛果)를 이루게 되리.
이와 같은 선서(善逝)의 가르침
만일 누가 그것 들으면
듣고는 다시 남을 위하여
더욱 늘리어 잘 연설한다.
그리고 인간 중에서 가장 높으신
저 모든 부처님 위해
그분들이 무여의(無餘依)의
청정한 열반에 든 뒤에는
보배 탑을 잘 세우나니
그것은 높고 또 묘하며
온갖 보배로 장엄하여
그 높이는 한정이 없다.
훌륭한 당기와 일산 세우고
보배 방울은 묘한 소리 내어
위로 유정천(有頂天)에 사무치고
좋은 장엄은 넓고도 크다.
만일 모든 보살로서
이 경전을 즐거워하면
이와 같은 상(相)들 가운데서
듣고는 깨끗한 믿음을 내리.
저 청정한 곳에서
이 바른 법을 펴면
그가 얻는 복덩이는
광대하고 가장 훌륭하리.
만일 모든 보살들로서
이 정법을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하여 널리 펴서
법을 아끼는 때[垢]를 씻으면
그가 얻는 복덩이와
훌륭한 공덕은 한량이 없어
나아가 큰 보리 구할 때
아무 장애 없이 얻을 것이다.
이 매우 깊은 경전은
모든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니
큰 보살 무리들은
받아 가지어 널리 전하라.
시방의 모든 부처님
모두 저 허공계에서
부처의 몸을 널리 나타내
일체 중생을 우러르게 하시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말씀하시자, 묘길상 보살마하살과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다른 보살들과 큰 성문과 일체 세간모든이들이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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