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 해전)
일본 요시라의 반간계에 넘어간 선조는 이순신을 반역죄로 체포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교대시킨다. 이 때가 1597년 2월 25일의 일이었다.
원균은 통제사 부임 후 3월 29일 장계를 올려 안골포와 가덕도의 일본군을 육군이 공격해 준다면 수군이 잔적을 모두 소탕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도원수 권율은 두 곳이 해안 깊이 있어 육군이 함부로 공격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한편, 조정의 비변사는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를 자유롭게 건너오지 못하게 해상에서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조정은 전선 134척과 추가 48척을 추가해 각각 이교대로 부산 앞바다로 진격해 해상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원균에게 내렸다. 이에 원균은 몇번의 거절을 표시했으나 결국 6월 18일 1차로 출전하게 되었다. 원균의 함대는 안골포와 가덕도에서 일부 승리를 했으나 피해도 커서 한산도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조정은 후퇴한 원균을 질타하며 재출전을 명령하였다. 이번에도 거절하던 원균은 선조의 명에 의해 도원수 권율에게 압송되어 곤장을 맞는 수모를 당했다. 할 수 없이 7월 14일 재출전 하게 되었다.
이것이 칠천량 해전의 서막이었다. 원균 함대를 맞은 일본군은 싸우는 척 하다가 도망가면서 부산까지 조선 수군을 끌어들였다. 부산 부근에서 풍랑을 맞은 조선 함대는 수습을 위해 가덕도로 회항했다. 하루 종일 노를 저어온 격군은 피로에 지쳐 있었고 물도 부족하였다. 가덕도에 도착하여 물을 구하기 위해 상륙한 조선군은 매복하고 있던 다카하시 나오쓰구의 일본 육군에 4백 명이 몰살 당하였다. 이에 서둘러 승선한 조선군은 거제도 영등포(구영)로 향했으나 여기서도 일본군의 매복에 피해를 입었다. 7월 15일은 비가 오는 바람에 양쪽 모두 사태를 지켜보았고 원균은 풍랑을 피해 칠천량으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칠천도와 거제도가 만나는 칠천량은 바람과 파다를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일본군은 해상 뿐 아니라 육지에서도 조선 수군의 이동경로를 예상하고 매복하고 있었다. 7월 16일, 새벽 4시 경 곤히 잠들어 있던 조선수군을 향해 일본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겹겹이 포위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피로에 골아떨어졌던 조선군은 기본적인 경계조차 하지 않고 있다가 등선 육박전을 펼친 일본군에 철저하게 패배하였다. 일부 함대는 진해와 거제도 해안을 따라 도주할 수 있었으나 미리 준비했던 일본군에게 모두 분멸되고 말았다. 원균 자신은 고성(固城) 추원포(秋原浦)에서 전사하였다. 다행히 배설(裵楔)이 이끌던 열두 척의 함대는 무사히 견내량을 빠져나와 도주에 성공하였다.
칠천량 해전으로 인해 조선 수군 함대는 배설이 도주한 열두 척을 제외하고 모조리 분멸당했고,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의 수군 지휘부가 모두 전사했다. 그동안 견내량을 경계로 이뤄지던 균형은 급격히 무너졌고, 남해의 재해권은 일본군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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