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스님들의 말씀

대자암 무문관 문정영 대선사

행성 2006. 12. 20. 19:12

        계룡산 무문관, 문정영(文瀞暎) 대선사의 법어 





               무문관이 있는 대자암으로 가는 길

계룡산에 함박눈이 내리는 날, 조계종 정화종단 총무원장이신 문정영(文瀞暎)대선사를 친견하고 경진년 새해를 맞아 법문을 청하기 위해 갑사(甲寺) 뒤 대자암(大慈庵)을 찾았다. 대자암으로 가는 길은 계룡산 준령의 가파르고 위태위태한 협곡을 길을 뚫어 만들어 구곡간장(九曲肝腸)과 같은 험준한 길이었다. 차안에서 차도 밑을 보노라면 아찔할 지경으로 단애(斷崖)의 깊은 계곡이 보이고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한다. 그러나 어렵사리 대자암에 당도하면 고해인 차안(此岸)에서 극락정토인 피안(彼岸)에 당도 하듯한 안도의 마음이 된다. 문정영대선사가 심혈을 기울여 수행도량을 조성하기 위해 산비탈을 깎아 도량을 만들었고, 그 도량에 삼매당, 시방당, 염화실 등 수많은 웅장한 대소 전각들을 창건하여 정토의 피안을 느끼기에 족했다. 문정영대선사가 대자암에 주석하시기 전의 대자암은 초라하고 외로운 암자였다.

              “조계종은 대사면속에 대화합을 이뤄야”

필자는 염화실에서 문정영 대선사를 친견하고 청법을 하기 앞서 세인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조계종의 작금의 정화불사운동의 상황에 대해 우선 말씀을 듣기로 하였다.
―조계종은 98년 ‘11.11전국승려대회’에서 월하종정께서 전국적으로 정화불사를 실천하라는 교시를 발표하시며 조계종 창종이래 전무후무할 대사면령을 내리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자세한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당시 월하종정의 교시는 역사적인 대자대비심에서 비롯된 용기있는 결단으로서 종단의 대화합을 바라는 깊은 배려라고 생각하며 경의를 표합니다. 사실 그동안 조계종에서 각종 징계와 함께 중징계를 받은 승려들은 일부 파렴치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종권을 잡은 자들이 종단정치적으로 반대파들을 비민주적으로 중징계의 철퇴를 내려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군부독재시절 독재자들이 반체제 인사들을 각종 방법으로 탄압하고 숙청한것과 비슷하지요. 조계종에서도 종권을 잡은 자들이 자비심을 베플지 않은 것입니다. 중징계로 탄압을 받은 승려들 가운데는 아까운 인재들이 많습니다. 전 총무원장도 몇 되지요?

          “수행자는 늘 정화정신으로 살아야”

― 조계종에는 오래전부터 제2 정화불사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뜻있는 사부대중은 입을 모우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정화불사운동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하는데, 정화불사운동과 조계종단에 관해서 말씀을 해주십시요.
“1600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불교의 수행자는 부처님의 정법(正法)으로 전해지는 독신, 즉 비구불교입니다. 불교에서 수행자에게 비구사상을 바라는 것은 개인의 수행에 의한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결혼해서 한 가정에 쏟는 편애적인 사랑보다는 광제중생(廣濟衆生)을 하면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비구전통의 한국불교가 일제 36년간의 강점기를 맞아 혹독한 시련을 받게 됩니다. 일제는 식민지통치 방법중 전통의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한 책략중의 하나가 우리전통의 비구불교를 말살하고 일제불교인 결혼불교, 즉 대처승화 하려고 획책한 것이지요.
일제의 회유와 강권이 있자 시리(時利)에 약삭빠른 일부 정신나간 승려들이 일제에 부회뇌동(附和雷同)하여 일제의 주구들인 친일파들이 되었습니다.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주지 모승려는 일제의 대동아침략전쟁에 미력이나마 일조를 한다며 비행기까지 헌납한 사실이 있습니다. 독립지사들은 피가 뼈가 부러지는 고문의 고통속에도 변절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억울하게 죽어갔는데 정신나간 승려는 비행기를 바치고 법당에서 ‘천황의 수만세(天皇 壽萬世) ’와 황군의 무운장구(皇軍 武運長久)를 위해 목탁을 치며 기도를 드렸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우리 역사입니까.
해방이 되어 사회는 각기 잃어버린 전통을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칠 때, 우리도 일제에 의해 기진맥진해져버린 비구불교를 회복하기 위해 경향의 사부대중이 일제히 궐기 했습니다.
1차 불교정화불사운동의 선구자들은 이청담, 하동산, 이효봉, 정금오, 윤월하 대선사 등 수많은 분들로서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으로 분연히 불교정화를 외쳤습니다. 당시 나 역시 미력이나마 선배스님들을 모시고 분연히 나섰지요. 그 때가 갑오(甲午)년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부대중이 할복속에 피흘리고 투옥되고 불구가 되고, 죽고…. 이러한 고통속에 마침내 비구종단인 오늘의 조계종이 출범한 것입니다.

        조계종 승려가 정화불사 반대하면 비구승이라고 할 수 없어

그런데 1차 정화운동이 있은지 40여년이 흐른 작금에 와서 조계종은 일제불교의 망령이 부활하여 조화를 부리는지 비구이념이 변질되는 듯한 부끄러운 사건들이 속출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어떤자들은 조계종의 비구행세를 하면서도 1차 정화불사를 비판하기조차 합니다. 정화를 해서는 안되는데, 정화를 해서 불교 망쳤다는 것입니다. 이 무슨 해괴한 사상입니까? 일제불교인 대처불교로 ‘맥’을 이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이런 사상을 가진 자들이 제2 정화불사를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세수 80을 바라보는 입장에 서있습니다. 일생을 선불교를 좋아해서 선수행으로 일관하는 나는 이제 시비를 떠나 주변을 하나 하나 정리할 때가 되었지요. 그러나 나는 작금의 조계종을 일편단심 사랑하기 때문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2 정화불사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우리가 1차 정화불사를 어떻게 성취했는데 역사의 퇴보입니까? 노병은 죽지 않듯이 다시 한번 기력을 다해 정화불사를 통해 조계종이 거듭 태어나라, 고 외치고 싶습니다. 나는 자나깨나 젊은 수행자들에게 이땅의 수행자가 정화정신이 사라지면 천황과 황군을 위해 기도하던 일제불교가 부활하고 말것입니다.

          “우리, 무문관(無門關)에서 공부 합시다”

“나는 1차 정화불사운동을 마감한 직후, 한국불교의 지도자가 태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도봉산 천축사에다 ‘무문관’이라는 선원을 개원했습니다. 부처님의 6년고행을 기념하여 누구든 무문관에 입방을 하면 6년간 선불교의 좌선속에 수행을 해야 했습니다. 61년부터 무문관을 개원하여 수행자들이 고행속에 깨달음을 위한 고행이 시작되었는데, 지면관계상 당시 수행한 분들 몇 분만 거명한다면, 관응, 경산, 지효, 홍근, 재선 스님 등 고덕들과 이어 도원, 구암, 원공, 등 고덕들이 깨달음을 얻어 선불교를 진흥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대자암에는 선원이 두 곳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문관이요, 둘째는 보통선원으로 시방당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조계종의 장래를 걱정하는 우리는 닭벼슬만도 못한 종권에 연연하지 말고 ‘초발심’을 회복하여 무문관에서 공부하였으면 합니다.”
    문정영대선사의 고향은 일본,. 재일 한국인으로 태어나 대학재학시절 우연히 금강경을 접하게 되었고, 밤새도록 금강경을 읽고 난 후 ‘도(道)’가 있다는 확신속에 승려가 되기위해 구도의 길에 나섰다. 금강산 마하연 선원, 유점사, 지리산을 거쳐 해인사에 이르러 비로서 전생에 인연있는 스승 ‘윤포산’대선사를 상봉하여 삭발위승(削髮爲僧)을 하였고, 스승의 인도에 따라 선원납자의 외길을 걸었다.
문정영대선사를 하직인사를 드리고 하산하려니 신비를 말하는 계룡산은 척설의 눈으로 허연 옷을 입은 산신령처럼 서서 필자를 지켜보고 있는듯 했다. 이날, 문정영대선사의 법어중 하나인 게송을 세상에 전한다.


庭前有月 松無聲

뜰앞에 달은 있으나 소나무는 그림자가 없는데

欄外無風 竹有聲

난간밖에 바람은 없으나 대나무는 소리가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