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에 대하여
사성제(四聖諦)
제(諦)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진실, 사실(事實), 진리 등을 가리키는 데 쓰이는 말이며, 동시에 엄숙한 단언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말이다. 즉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서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 먼저 병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원인을 알아낸 다음, 건강한 상태의 정상적인 표준을 알아서 거기에 맞는 치료 방법을 강구하듯이, 고(苦) 집(集) 멸(滅)을 알고 멸에 이르는 바른 길[八正道]을 알고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성제(苦聖諦)
우리 인생의 현실은 고(苦)라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이미 삼법인의 교설에서 설명하였다. 이 고제(苦諦)에 대해 경전은 8가지 괴로움[八苦]을 들고 있다.
‘어떤 것이 고성제인가 생(生)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나라고 집착(取着)된 몸과 마음)은 괴로움이다.’ 증아함경 권7 분별성제경
불교에서 ‘괴롭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인생에서의 행복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물질적·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하였다. 즉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는 속성을 가진 의미에서 괴로움인 것이다.
집성제(集聖諦)
괴로움의 집[苦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집(集)이라는 술어는 원래 ‘결합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한자의 뜻대로 ‘모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집기(集起)’라고 하면 뜻이 더 잘 통할 것이다. 이는 괴로움은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경에서도 집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것[集]은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갈애(渴愛)로서 격렬한 탐욕(貪慾)에 묶여 있으며, 여기 저기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나선다[喜貪].
다시 말해서 그것은 욕애(欲愛: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유애(有愛:존재 그 자체와 형성에 대한 갈망), 무유애(無有愛: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 등이다.잡아함경 권5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과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탐욕·욕망·갈애·열망 등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보았듯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이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고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즉 느낌[愛]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접촉[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면서, 결국 연기적 의미의 ‘집(集, 緣起)’이 되는 것이다.
멸성제(滅聖諦)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는 집제(集諦)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다. 고의 원인이 애(愛)·탐(貪) 등의 집기(集起)라면 멸제는 그것을 없애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괴로움 또는 고(苦)의 지속에서 해탈하고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생사(生死)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라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滅)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를 원적(圓寂), 혹은 열반(涅槃)이라고 하여,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멸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도성제(道聖諦)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하는 수단을 말한다. 그 방법은 여덟 가지 수행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곧 팔정도(八正道)의 수행방법이다.
괴로움의 멸(滅)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도성제는 위에서 제시된 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즉 고의 멸진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 항목인 것이다. 종교의 생명은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 데 있다는 말이 있다. 걸어간다는 것은 곧 수행을 실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성제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서는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라 불리는 팔정도(八正道)가 있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 가지 실천 사항을 가리킨다.
사성제는 이처럼 고·집·멸·도의 네 가지의 진리이다. 이 진리는 고제·집제 이 제(二諦)를 유전(流轉)하는 인과로 나타내고, 멸제·도제 이 제를 깨달음[悟]을 위한 인과로 나타낸다. 곧 고·집 이 제는 세간의 인과 속에서 흘러가는 것이고, 멸·도 이 제는 세간의 인과를 초월하여 깨달음을 얻는 행위이다.
사성제는 고·집 이 제와 멸·도 이 제를 합한 것인데, 고·집 이 제는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근본[集]을 말한 것이고, 멸·도 이 제는 이상향의 세계[滅]와 깨달음[悟]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괴로움의 근원인 번뇌라는 집(集), 그로 인해 따라오는 괴로움이라는 고(苦), 괴로움을 여의기 위하여 수행하고 얻은 깨달음이라는 도(道), 깨달음으로 얻은 이상향 곧 열반의 세계라는 멸(滅)의 네 가지이다. 곧 고·집·멸·도이다.
사성제는 이러한 고·집·멸·도를 합한 것인데, 그것은 번뇌[集]가 괴로움[苦]을 유발함으로써 그것을 깨닫고[道] 열반[滅]의 세계에 이르는 것을 일컫는다.
사성제(四聖諦)
제(諦)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진실, 사실(事實), 진리 등을 가리키는 데 쓰이는 말이며, 동시에 엄숙한 단언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말이다. 즉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서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 먼저 병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원인을 알아낸 다음, 건강한 상태의 정상적인 표준을 알아서 거기에 맞는 치료 방법을 강구하듯이, 고(苦) 집(集) 멸(滅)을 알고 멸에 이르는 바른 길[八正道]을 알고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성제(苦聖諦)
우리 인생의 현실은 고(苦)라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이미 삼법인의 교설에서 설명하였다. 이 고제(苦諦)에 대해 경전은 8가지 괴로움[八苦]을 들고 있다.
‘어떤 것이 고성제인가 생(生)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나라고 집착(取着)된 몸과 마음)은 괴로움이다.’ 증아함경 권7 분별성제경
불교에서 ‘괴롭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인생에서의 행복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물질적·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하였다. 즉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는 속성을 가진 의미에서 괴로움인 것이다.
집성제(集聖諦)
괴로움의 집[苦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집(集)이라는 술어는 원래 ‘결합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한자의 뜻대로 ‘모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집기(集起)’라고 하면 뜻이 더 잘 통할 것이다. 이는 괴로움은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경에서도 집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것[集]은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갈애(渴愛)로서 격렬한 탐욕(貪慾)에 묶여 있으며, 여기 저기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나선다[喜貪].
다시 말해서 그것은 욕애(欲愛: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유애(有愛:존재 그 자체와 형성에 대한 갈망), 무유애(無有愛: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 등이다.잡아함경 권5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과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탐욕·욕망·갈애·열망 등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보았듯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이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고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즉 느낌[愛]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접촉[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면서, 결국 연기적 의미의 ‘집(集, 緣起)’이 되는 것이다.
멸성제(滅聖諦)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는 집제(集諦)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다. 고의 원인이 애(愛)·탐(貪) 등의 집기(集起)라면 멸제는 그것을 없애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괴로움 또는 고(苦)의 지속에서 해탈하고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생사(生死)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라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滅)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를 원적(圓寂), 혹은 열반(涅槃)이라고 하여,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멸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도성제(道聖諦)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하는 수단을 말한다. 그 방법은 여덟 가지 수행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곧 팔정도(八正道)의 수행방법이다.
괴로움의 멸(滅)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도성제는 위에서 제시된 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즉 고의 멸진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 항목인 것이다. 종교의 생명은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 데 있다는 말이 있다. 걸어간다는 것은 곧 수행을 실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성제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서는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라 불리는 팔정도(八正道)가 있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 가지 실천 사항을 가리킨다.
사성제는 이처럼 고·집·멸·도의 네 가지의 진리이다. 이 진리는 고제·집제 이 제(二諦)를 유전(流轉)하는 인과로 나타내고, 멸제·도제 이 제를 깨달음[悟]을 위한 인과로 나타낸다. 곧 고·집 이 제는 세간의 인과 속에서 흘러가는 것이고, 멸·도 이 제는 세간의 인과를 초월하여 깨달음을 얻는 행위이다.
사성제는 고·집 이 제와 멸·도 이 제를 합한 것인데, 고·집 이 제는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근본[集]을 말한 것이고, 멸·도 이 제는 이상향의 세계[滅]와 깨달음[悟]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성제는 괴로움의 근원인 번뇌라는 집(集), 그로 인해 따라오는 괴로움이라는 고(苦), 괴로움을 여의기 위하여 수행하고 얻은 깨달음이라는 도(道), 깨달음으로 얻은 이상향 곧 열반의 세계라는 멸(滅)의 네 가지이다. 곧 고·집·멸·도이다.
사성제는 이러한 고·집·멸·도를 합한 것인데, 그것은 번뇌[集]가 괴로움[苦]을 유발함으로써 그것을 깨닫고[道] 열반[滅]의 세계에 이르는 것을 일컫는다.
출처 : 초심향기
글쓴이 : 초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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