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어떤 종교라도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어떤 종교도 믿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한 종교를 선택해서 그 종교의 가르침을 믿는 순간부터 당신은 그 종교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루는 믿고 하루는 믿지 않는 어중간한 신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컨대 당신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당신 생각과 언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고유한 성격이 있고, 꿈이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적합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와 그 종교의 영적인 수련법을 판단할 때 반드시 고려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얼굴이 달리 생겼듯이 종교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종교를 이런 식으로 인식하지 않더라도,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종교로부터 구원을 얻었고 지금도 구원을 얻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인류에게 구원을 주었다는 점에서 모든 종교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모든 종교가 고유한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종교가 외적인 의식보다 훨씬 중요한 근본적인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정신의 정복입니다. 하지만 정신의 정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엄청난 인내심과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도들이 정신 수련을 이차적인 것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불교를 믿지만, 불교의 궁극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외적인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또는 입으로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신실한 신도처럼 보이려 합니다.
티벳 불교의 의식에서는 북과 종, 심벌즈 등과 같은 악기를 사용합니다. 이런 요란한 의식을 목격한 사람들은 '아니 저런 사람들이 불교신자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이 아닙니다.
외적인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에, 많은 사람이 공허한 세상에서 정신을 해방시키는 명상을 거의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사랑과 연민, 해탈을 위한 수련, 달리 말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부족한 내면의 성찰을 간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독교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요일마다 예배에 참석해서 눈을 꼭 감고 기도문을 암송합니다. 하지만 일상의 삶에서 어려움에 부딛칠 때 대부분의 신도가 기독교 교리에서 허용하지 않는 행동을 자행합니다. 굳건한 믿음을 보여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결국 불교이든 기독교이든 간에 종교를 믿는다고 입으로 말하지만 진정한 종교인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의식이 진행되는 공간에서는 누구보다 진실해 보이는 신도이지만, 종교를 믿는 목적에 부합되는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셈입니다.
우리 정신이 어려움에 빠져 허우적댈 때 종교나 영적인 수련이 효과를 발휘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원하는 방향대로 착착 진행시키는 사람에게 종교를 권해서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거꾸로 종교인이라도 문제가 생길 때 뭇사람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종교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종교의 가르침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가르침대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목표가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련을 통해서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 달라이라마의 아주 특별한 선물 >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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